윤 정 숙

 한껏 멋을 냈다.
 검버섯이랑 주름살이 가려지도록 정성들여 화장을 하고, 젊은이들의 취향일 법한 디자인의 밝은 색 겉옷을 걸친 외양이, 조도(照度) 낮은 방 안 거울 속이어서인지 제법 근사해 보였다. 내친 김에 구두도 굽이 좀 높은 것으로 신었다. 다리가 고장이 난 후로는 신어 볼 엄두도 내지 않던 것이었는데, 불안한 마음을 비켜놓고 신고 나선 발걸음이 우선은 상쾌하고 자신만만했다.
 내 모습이 60대 초반쯤으로 실제 나이보다 훨씬 젊어 보일 것이라 여겨져, 전철(電鐵)의 교통 약자 우대 좌석에 빈 자리가 있음에도 앉지를 않았다. 그것은 젊은 사람이 그 곳에 앉아 있을 때 왜 여기 앉았느냐며 호통 치는 노인들을 가끔 본 터라, 웃기는 얘기이지만, 혹시 그런 봉변을 당하면 어떡하나 하는 기우에서였다. 그러면서 오래간만에 만나는 친구들이 어쩜 이렇게 젊어 보이느냐며 내지를 부러움의 탄성과 찬사를 즐겁게 상상하면서 몇 정거장인가를 지나고 있었다.
 차창 바깥쪽으로 의미 없는 눈길을 주고 섰는데, 누군가 뒤쪽에서 팔을 잡아당겨 돌아보니, 50대로 보이는 부인이 일반 좌석의 빈 자리를 가리키며‘할머니, 앉으세요’한다. 할머니? 할머니 소리를 생전 처음 듣는 양 순간 소스라쳐 놀랐는데, 그 때 나는 할머니가 아닌 양 행세하며 남들도 그런 나로 속아 줄 줄 착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변변히 고맙단 인사나 사양도 않고 자리에 가 주저앉았는데, 겁 없이 신은 굽 높은 구두가 한참 전부터 발을 죄어 오면서 다리를 아프게 하고 있었다. 공연히 스스로 무안해서 창 쪽으로 얼굴을 돌리니, 굴 속 어둠이 받쳐진 유리에 볼 품 없이 후줄근하고 주름 가득한 탄력 없는 푸석한 얼굴이 마주 본다. 불과 한 시간도 안 된 사이에‘한여름 밤의 꿈’에서 깨어나 참담한 기분이 되어 어이없는 눈인사를 건넸다. 스스로 부끄러울 뿐, 누구에게도 피해를 준 짓거리는 아니라는 게 내게 내세운 위안이라면 위안이었다.
 생각해 보면, 사람들은 모두들 참 다양한 착각 속에 살고 있는 것 같다. 조금 예쁜 용모를 가졌대서 세상 모든 남자의 흠모를 받을 거란 젊은 아가씨의 귀여운 착각이 있는가 하면, 세상이 아무리 바뀌었대도 나만은 우리 집안의 어른으로서 권위를 인정 받고 있다는 할아버지들의 서글픈 착각도 있다.‘내 생각은 항상 옳다’면서 저돌적으로 사업을 확장하다가 실패를 하거나, 도박장에서의 겁 없는 베팅으로 돌이킬 수 없는 나락으로 떨어지는 예는 모두 자기의 판단을 과신한 착각의 소산이다. 그러나 이런 종류의 착각은 개인적인 것이어서, 그  결과물들이 자기 자신과 가족을 괴롭히고 힘들게 할지언정 사회 전체에 끼치는 영향은 크지 않다. 그래서 타인들은 그들이 착각을 하건 말건, 좌절을 하건 말건 솔직히 관심 밖이다.
 문제는, 나에게 심대한 영향을 끼치나 내 힘으론 어쩔 수 없어, 진찰과 진료 등 생명을 의탁해야 할 의사가 혹시 무언가 착각해서 돌이킬 수 없는 결과를 가져다 줄까봐 늘 두렵다. 또한 내 의지나 호불호(好不好)에 관계 없이 내 운명이 맡겨져버린 국회의원 등 이 나라의 정치가들이 무언가 착각한 끝에 내린 결정으로 나를 비롯한 내 가족과 이웃 등 국민을 엉뚱한 고생길로 이끌까봐 겁난다. 핵을 가진 나라의 높은 분이 핵 단추를 잘못 누르는 엄청난 착각은 절대로 없을 줄 알지만, 그것에 생각이 미칠 때 등골이 오싹함도 숨길 수 없다.
 누가‘착각은 자유’라고 했을까? 판단 여하에 따라 운명이 갈릴 수 있는 개인도 그렇지만, 한 가정의 가장인 아버지로부터 지방자치단체의 장(長)이나 한 나라의 대통령에 이르기까지 남의 인생 혹은 운명에 돌이킬 수 없는 영향을 끼칠 자리에 있는 사람은 절대로 착각할 자유가 있어서는 안 된다.
 오는 4월에 있을 국회의원 선거를 앞두고 벌써부터 거리에 대형 현수막이 나붙고 있다. 그들 중 자신이 능력 있는 애국자라고 착각하고 있는 사람이 없는지 유심히 살펴 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