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쪽 눈을 감고 지나온 시간을 본다. 수많은 낱낱이 획획 지나간다. 하나의 과거가 또 하나의 과거에게 잘 가라고 말한다. 가능하면 다시는 뒤돌아보지 말고 앞으로 쭉쭉 나가라고 서로 격려한다.

   그 많은 시간을 걸어왔건만, 손에 잡히는 것이 없다. 도대체 무엇이 왜 라는 단어가 동공 속에서 모두가 손을 잡고 정답게 걸어갈까. 늦은 밤, 라면 한 봉지를 들고 혼자 집으로 들어가 본 사람은 안다.

   돌아보면 서럽고 바라보면 겁나고 상상하면 어딘가 초라한 듯 대단한 듯 아무 것도 아닌 듯 그러나 조금은 억울한 듯 괜히 서러움이 엄습한다. 난감하다. 누가 윤택하려는 삶을 방해하고 있는 걸까. 자신일까 타인일까.

   세상의 입들이 어떤 매질로 흥분할 때 자의식은 행방불명된 꿈을 지혜롭게 찾아갈 수 있을까? 없을까? 갈수록 태산이라면, 태산을 넘을 경우, 자신의 일이라면 버거워 난처해 하지만 타인인 경우 어느 정도 즐기고 있는 것도 사실일터,
 
   정교한 배타에 흔들린다는 것은, 너와 내가 없는 불완전한 시간, 우리가 모르는 끝으로 자꾸만 달려가는 이상한 길, 세상을 바라보는 일이 나를 바라보는 일이란 걸 아직도 모르고 있다는 것이다.

   손을 대지 않아도 넘어지는 전봇대, 오늘은 이것만을 생각하다가 하루가 다 갔다. 어둠이 나리면서부터 길쭉한 그림자도 없어지고 어둠을 밝히는 환함도 없어졌다. 삶도 이럴까 거울에 비쳐 봐도 답은 없다. 그래서 두렵다.

   세월은 무언가를 들고 어디론가 수없이 가는데, 어찌 보면 나도 없고 너도 없고 도대체 있는 것은 무엇인가. 쏟아지는 잠 때문에 평생 허공길을 걸었던 것은 아닌가. 한숨 소리를 내면 기억은 연기처럼 매웠다.

   흙먼지가 뿌옇게 인다. 아까시아꽃 향기가 진하다. 거울 앞에서 몸을 한번 휘돌아보고 동산에 올랐다. 분홍 빨강 파랑 주황색 꽃들이 저마다 짙은 몸짓으로 유혹하고 있었다. 참으로 혹 했다. 그런데 발걸음은 다른 곳을 향하고 있었다.

   더 이상 머물 곳이 없어 비로소 날개가 돋는다면 바람의 무게보다 가벼워야 잘 날수 있을 것 같은데, 잘라내고 깎아낸 마음의 날카로운 뼛조각들, 명료하게 정리된 마음을 들춰 본다. 인정 없는 저녁은 어디론가 떠날 준비를 하고,

   온갖 관계로부터 풀려난 만물들이 우두커니 서 있다. 나도 그랬고 너도 그랬다. 이 멍청한 놈이 어디까지 뛰어가야만 초록 수행자를 만날 수 있을까. 고개를 갸웃거리면 어느새 불볕더위에 나무와 풀들이 타들어 가고 있다.

   수액을 충분히 마시지 못해서 일까. 숲은 말라가고 먼지가 일었다. 빗방울이 숲의 눈물을 닦아주었으나 바람이 나직이 불어 숲이 몸을 세우는데 애를 먹는다. 비탈은 미끄럽고 숲은 더 젖는다. 젖는다는 것은 춥다는 뜻인데, 추워서 떠는 걸 설움이라 한다지요?

   발소리들이 다가와 삿대질하기 전에 스스로를 보듬어 교훈이 있는 연표 속으로 들어가자. 누가 쳐들어와서 흔들어도 제 삶을 절정에 올리려면 어떤 강요도 물리칠 수 있는 용기와 힘이 필요하다. 흉흉한 말들이 심심찮게 들린다. 갈수록 지혜가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