빅 버스(Big Bus : 관광버스)에 높직이 올라앉아 홍콩의 중요거리를 관광하면서 놀란 것은, 다닥다닥 붙어 제 각각 하늘을 찌를 듯 솟아 있는 빌딩이나 두 집 걸러 있다시피 많은  화려한 쇼케이스의 보석 가게나 시계점 때문이 아니었다. 빌딩 옆 맨바닥이나 공원 울타리 밑 혹은 고가도로나 육교 계단 아래마다 삼삼 오오 떼지어 있는 무수히 많은 젊은 여자들을 보고서였다.
 그녀들 대부분은 돈을 벌러 홍콩에 와서 가정부로 일하고 있는 필리핀 국적의 여성들이라고 했다. 일요일 등 공휴일엔 고용인을 무조건 쉬게 해야 하는 홍콩의 법(法)과, 학교나 직장에 가지 않는 날엔 가족끼리만 오붓하게 지내고 싶은 주민들의 마음이 맞아 떨어져 휴일마다 가정부들은 거리로 내몰렸고, 내가 방문한 때가 마침 크리스마스 휴가기간이라 예외 없이 거리거리 빠끔한 공간은 모두 그 젊은 여인들의 차지가 되어 있었던 것이다.
 잔뜩 흐린 하늘에선 가끔 빗방울도 흩뿌리고 스산하게 바람도 불고 있었지만, 버스가 신호에 걸려 정차할 때마다 보니, 여자들은 그런 상황이 아주 익숙한 듯 모두들 태연한 모습이었다. 말없이 우두커니 앉아 있는 사람도 있었지만 둘러앉아 이야기를 하거나 음식을 먹는 이가 많았다. 더러는 돗자리를 깔고 앉아 카드놀이를 하고 있기도 했는데, 낮엔 그럭저럭 시간을 보낸다지만 기온이 떨어지는 밤은 어떻게 지내는지 일개 여행객일 뿐인 내가 걱정을 하고 있었다. 우리나라 같으면 적은 돈으로 편히 따듯하게 지낼 수 있는 찜질방이 곳곳에 있는데 하면서, 홍콩의 사정을 잘 모르는 채로 그녀들이 가여워서 도무지 마음이 편치 않았다.
 아무튼 고금을 막론하고 가정이든 나라든 문제가 생기면 여자들이 고생이다.
 필리핀이 어떤 나라인가. 육십여 년 전만 해도 필리핀은 아시아에서 가장 잘 사는 부요한 선진국으로서 우리들의 선망의 대상이었다. 정치 지도자들의 부패와 안일한 대응이 결국은 가정에 있어야 할 여인들을 국외로 내몰아 저 고생을 시키고 있는 것이다. 몇 년 전 필리핀을 여행했을 때 느낀 것인데, 공항과 호텔에서 본 그 곳 남자들은 무기력하고 언뜻언뜻 무개념해 보이기까지 했고, 거리의 아이들은 우리의 지난 오육십 년대를 떠올리게 했다. 그 절체절명의 와중에 분연히 일어나 외국에까지 나가 삶을 개척하고 있는 것이 역시 오늘 저 고생을 마다 않는 여인네들이다.
 대통령을 비롯해 정치하는 사람들의 책임이 막중한 것은 나라의 안위가 그들 손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 그들의 오판이나 부패와 탐욕은 나라를 망하게도 하고 최빈국의 나락으로   떨어뜨려 일반 국민들을 비참한 삶으로 내몬다. 그 와중에 여인들이 겪는 횡액의 비참함은 역사가 증언하고 있다.
 학창시절 ‘화냥년’ 즉 환향녀(還鄕女)의 어원(語源)을 알고 분해서 치를 떨었던 것은, 무능한 왕 인조(仁祖)와 무사안일에 빠진 대신들로 하여 나라의 운명이 풍전등화격이 된 것까진 그렇다 치고 그 후의 처사를 용납할 수 없어서였다. 당시 청 나라에 끌려 간 수 만여 명의 무고한 여염 아낙네들이 온갖 고생을 하다가 천신만고 끝에 돌아왔을 때, 아내나 누이를 보내며 제 목숨을 부지했던 남정네들은 돌아온 여자들을 반기기는커녕 수치스럽게 여겨 집에 들이지 않을 뿐 아니라 은장도 등을 건네며 은근히 자결할 것을 권했다고 한다. 우리 역사에서 보는 비겁하고 무능한 남자들의 맨얼굴이다.
 오늘날까지 가슴에 응어리져 용서가 안 되는 ‘위안부’ 문제도 기실 따지고 보면 망국(亡國)의 결과물이다. 임금을 비롯해 조정 대신들이 합심하여 세계 정세에 귀를 열고 만일을 위한 대비를 철저히 했다면 감히 일본이 우리나라를 넘보며 수탈할 생각을 하지 못했을 것이다. 남자들도 징용 등으로 끌려 가 고생을 했다지만, 꽃다운 나이에 겪은 우리 여인들의 고초에 어떻게 비할 수가 있겠는가.
 지난 구십 년대 말 외환위기 때도 직장에선 여자들을 만만히 여겨 먼저 퇴출시켰고, 명퇴니 구조 조정으로 남편들이 직장에서 쫓겨나 야산을 오르내릴 때 노동판으로 식당의 부엌으로 뛰어들어 가정을 지켜낸 것은 여자들이었다. 잘못은 나라 살림을 잘못한 위정자들에게 있는데, 분수껏 성실한 삶을 묵묵히 살던 서민들 그 중에도 여자들이 직격탄을 맞고 온갖 고생을 감내해야 한 것이다.
 해가 바뀌자 4월 총선을 앞두고 잿밥에만 관심이 있는 인사들이 노골적으로 합종연횡하고, ‘국민’이니 ‘민생’이니 ‘민주’니 하는 단어들을 또 다시 구역질나는 입술에 장식품처럼 달고 있다. 전혀 제 역할을 못하면서 국고(國庫)만 축내는 인사들을 또 뽑아 안하무인(眼下無人)의 권력집단을 또 만들어야 하는지 회의가 드는 게 사실이다. 그러나 피하지 못할 일이라면 눈을 부릅뜨고 옥석(玉石)을 가릴 일이다. 타국까지 흘러 가 풍찬노숙(風餐露宿)하는 저 필리핀 여인들의 고생이 먼 남의 이야기가 아님을 알아야 한다.

(2016. 1. 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