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십일 월 중순, 일본 하네다공항 입국심사대에 서니, 슬그머니 기분이 나빠졌다.
 말로만 듣던 지문을 한 손가락도 아니고 양손 검지 모두를 찍는데, 자세하게 나오지 않았는지 세 번이나 거듭 찍고, 그것도 모자라 얼굴 사진까지 큼지막하게 찍고서야 여권에 도장을 찍어 주는 것이었다. 무표정하게 사무적으로 일을 처리하고 있는 직원의 얼굴에선 아무 것도 읽어낼 수 없었지만, 일본에 대한 해묵은 적개심에다 작금의 아베 총리의 방자한 언행들로 해서 생긴 선입견 때문인지, 분개랄까 굴욕감 같은 게 일순간 목구멍까지 차올랐다. 이건 제 집(나라)에 온 손님에 대한 예의가 아니다. 많은 나라를 여행해 보지는 않았지만 이런 무례는 처음이라 당황스럽기도 했다. IS 등에 의한 테러가 세계 도처에서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펑펑 터지고 있는 터라, 엄격하게 감시하여 사고를 예방하려는 의도를 모르는 바는 아니다. 하지만 팔순의 할머니가 줄 수 있는 위해의 크기를 가늠해 보면서, 씁쓸하고 불쾌한 기분은 공항과 연결된 전철을 탈 때까지 가시지 않았다.
 전철은 매 역마다 일련번호가 매겨져 있어, 도쿄가 초행인 우리 가족 3대(남편과 며느리와 손자 둘)가 숙소로 예약해 둔 호텔이 있는 시나가와(品川)역을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게 했다. 일어(日語)가 서툴러도 출입문 위 전광판에 역 이름과 함께 뜨는 아라비아 숫자만 읽을 수 있고 내릴 역의 번호만 바르게 알고 있다면 역을 혼동해 낭패 볼 일은 없었다. 우리나라 전철에도 이런 작은 배려가 있다면, 외국인이라든가 전철 타기가 일상이지 않고 서울 지리에 어두운 시골 분들에게 도움이 되겠구나 하는 생각이 얼핏 지나갔다.
 하지만 나는 공항에서 이미 뒤틀린 심사가 되어 있었다. 자리를 잡고 앉자 전철 안을 휘둘러보며 트집거리를 찾아 매의 눈을 희번덕거렸다. 멋쟁이들은 전철을 이용하지 않는지 차 안 가득 우중충한 옷차림의 남녀들이 눈에 들어왔다. 흥, 이들은 유행에 둔감하구나, 우리나라 사람들의 세련된 차림새를 떠올리며 나는 쾌재를 불렀다. 스마트폰을 들여다보고 앉아 있는 젊은이가 두엇 있었지만 책을 들고 서 있는 청년이 눈에 들어왔다. 너무 조용해서 음향이 꺼진 흑백영화의 정지장면 같다고 생각하면서 괜스레 입을 삐쭉하는데, 그 청년 앞의 자리가 비어 있는 채다. 찬찬히 둘러보니 비어 있는 자리가 유약자석이 아닌데도 몇이 더 있다. 순간 우리나라 전철 안이 떠올랐다. 짙은 화장에 멋진 옷차림을 한 젊은이들, 자리에 앉았든 섰든 모두가 들여다보고 있는 스마트폰, 고함을 지르듯 하는 통화 소리, 절대로 자리를 양보하지 않겠다는 양 눈을 질끈 감고 앉아 있는 청년.... 그 옛날 학창시절의 우리 또래들은 대중교통을 이용할 때 좌석에 앉지 않는 걸 불문율로 여겼었는데 하면서 슬그머니 부끄러워져 눈을 내리까는데, 담갈색의 전통 의상을 입은 초로(初老) 여인의 얌전히 모은 하얀 버선발이 눈에 들어왔다. 
 사흘을 올차게 도쿄 시내 여러 곳을 주로 전철을 이용해 이동하며 구경을 했다. 택시 요금이 비싸기도 하고, 도쿄의 전철망이 사통팔달로 잘 이어져 있어, 거리의 풍경이며 사람들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보고 느끼기에 더할 수 없이 좋아서였다. 여행사의 패키지여행으로는 누릴 수 없는 자유로운 접근이고 탐색이었다. 그러는 중에 내 눈은 부지런히 어떤 흠 즉 부정적인 흉 거리를 찾아 바빴음은 물론이다.
 복잡한 환승역에서 어느 열차로 갈아탈지를 몰라 쩔쩔매고 있는데 더듬거리는 한국말로 자세하게 노선을 알려 주고 간 중년 여인, 친절하고 사려 깊은 팬시점 점원, 난하지 않은 차림새로 어느 곳에서든 말없이 줄을 서서 차례를 기다리고, 대중식당에서 조용조용 얘기하며 식사를 하고, 절전(節電)을 하는 듯 전체적으로 조명은 다소 어두우나 차분하게 질서가 잡혀 보이는 거리 등 인정하기 싫지만 본받았으면 하는 광경들이 눈에 들어왔다.
 한국어를 공부하고 있는데 어렵다며 상냥하게 웃던 시내 투어 버스 안내양, 일본에서 뛰고 있는 한국 야구선수에 대해 호감을 표하던 택시 기사 등을 보면서, 신문 등을 통해 알고 있는 그네들의 혐한(嫌韓)의 감정은 얼굴 어느 곳에 숨겨져 있나 살피지 않을 수 없었다.      일본인은 절대로 자기들의 속내를 드러내지 않는다고 한다. 오만하고 교활하며 침략의 DNA가 면면히 그들 속을 관통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더라도 지피지기(知彼知己)면 백전백승(百戰百勝)이라고 했다. 그들의 속성을 꿰뚫어 알고, 우리의 실력을 키워 당당하게 대처할 일이다. 싫다고 피할 수 있는 이웃나라가 아니니 공존의 길을 모색함이 현명하다. 더구나 세계가 한 축으로 움직이고 있는 글로벌시대가 아닌가.
 그러나저러나 다시 도쿄를 찾을 기회를 만들어 이번에 놓친 일을 꼭 했으면 싶다. 그 때야말로 긴자의 거리를 천천히 거닐며 구십여 년 전 내 아버지가 꾸었을 청춘의 꿈을 조용히 더듬어 보았으면 싶다. 그 시절 아버지는 그 거리 어는 뒷골목을 달음질치며 학비에 보탤 신문을 돌리곤 했었을까. 안타깝게 요절한 아버지의 젊음과 꿈과 학문에의 열망이 응어리져 있을 동양대학이 있는 하라마찌의 하쿠산 캠퍼스도 찾아보고 싶다. 옛 흔적이 한 오라기도 남아 있지 않을지언정, 내 아버지의 발자국을 담아 안았을 그 교정에 서서 여일히 푸를 하늘을 올려다보면 좋겠다.

(2015. 12. 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