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긋한 냄새가 진료실에 퍼진다.
오후 진료에 지친 내게 병원 정원서 딴 모과 향이 나를 위로 한다. 고향 시골 증조부님께서 지은 서강(西岡)정사 정원에도 내가 태어나기 전부터 심은 모과나무가 있고 우리병원 옥상과 현관 옆에도 모과나무가 있다.

<어물전망신은 꼴뚜기가 시키고 과일망신은 모과가 시킨다.>는 말이 있다. 그러나 모과와 나의 인연은 증조부 때부터이니 좀 특별한 것 같다. 그리고 그 실체는 최근 새롭게 다가온다.

그리고 감나무 또한 모과와는 또 다른 면으로 나의 애증(愛憎)의 깊이를 더하고 있다. 육이오 때 불타 없어진 고향집 안채의 뜰에 감나무 몇 그루가 있었다. 내가 코흘리개 시절, 가을이 되면 동네 어른들이 감을 딴다. 홍시가 되기 전 노란감은 따서 말려 곶감을 만든다. 서리를 맞고 완전히 익어 붉은 홍시가 되면 솔잎상자에 고이 담아 찬 곳에 보관하고 먹는다.

감을 딸 때 보면 높은 곳에 있는 몇 개는 남겨둔다. 어릴 때 그것이 이상하여 어머니께 여쭈어 보았다.
“엄마! 저 감들은 왜 안 따지요?”
“아! 그것은 까치밥이란다. 좋은 소식을 전해주는 까치가 먹도록 남겨 두는 것이지!”
이러한 어머니의 대답에 어린 마음에도 무언지 모를 감동이 가슴을 스쳐갔다. 실제 그 홍시를 까치가 먹는 현장을 목격하지는 못했다. 그렇지만 반백이 된 지금까지도 나의 뇌리에는 까치가 홍시를 쪼아 먹고 있는 모습을 생생하게 그릴 수 있다.

병원 증축 시 옥상에 심은 보시감나무에는 튼실하고 맛있는 감이 열렸다. 그때 함께 심은 모과나무는 별로 돌보지 않았으나 감나무에는 거름도 많이 주고 가지치기도 잘해주었다. 감이 많이 열리고 아름다운 붉은 홍시가 되고 환자들과 함께 감상하다가 나누어먹고 나도 어머니처럼 몇 개의 감은 까치밥으로 남겨 두리라고 마음으로 다짐했다. 도심에서도 홍시를 쪼아 먹는 까치의 모습을 숨어서 가만히 홈쳐볼 것이다. 나의 꿈은 그렇게도 야무졌다.
그러나 이 같은 나의 간절한 기대에 감나무는 한 번도 부응해주질 않았다. 맛있는 열매가 오히려 화금이 된 것이다. 나의 기대에 반하여 너무나 탐스럽게 익어가는 감을 보면 환자나 직원이나 가릴 것 없이 이성이나 양심이 사라져 버리는 모양이다. 주인 몰래 따려다 보니 가지까지도 꺾어 놓는다. 맛있고 보기 좋은 감이 미인박명(美人薄命)의 신세가 되고만 것이다.

한해는 감이 많이 열려 큰 기대를 했다. 그리고 열심히 지켰다. 하루는 회진 후 익어가는 감을 보러 옥상정원에 나갔다. 감나무를 쳐다 본 순간 나는 충격을 받았다. 감이 한구개만 달랑 달려있었다. 화가나 관리직원을 불러 호통을 쳤다.
“아니 그렇게 부탁했건만, 어떻게 된거요?”
그가 시무룩하게 대답했다.
“할머니가 한두 개만 남겨두고 모두 따라고 하셨어요. 원장님도 아시는 줄 알았지요!” 원장 어머니의 명령으로 땄다는 것이다. 어머니께 전화를 걸어
“어머니 감 왜? 다 따 버렸어요?” 하고 불손한 목소리를 냈다.
“야야! 내게 맡겨 두었다간 쓴 감하나 구경하기 어렵겠다. 내가 곶감 만들어 놓았으니 먹으러 와.”

과일 전 망신을 시킨다는 모과는 이 겨울에도 나의 진료실에서, 내 자가용 속에서 상큼한 향기를 내뿜고 있다. 꿀f에 절여 둔 모과는 감기들 때마다 나의 목을 부드럽게 해 준다. 못생긴 모과는 나의 푸대접을 전혀 개의치 않고 나에게 효도를 보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