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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선 초대구의원 박 종 우 현 금천문화원장특별대담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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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3.12.26  23:40: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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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녕하십니까? 지방자치 시대가 1991년 온 국민의 열망 속에 열렸습니다. 오늘 이 자리는 박종우 현 금천문화원장께서 구로구와 금천구 의원을 지내면서 1995년 구로구로부터 금천구 분구를 이끌어 낸 주역이자 금천구 지명까지 지은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금천구의 출범과 당시 의정활동, 그리고 구의원의 역할에 대해 듣는 자리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금천구 분구의 역사적인 순간을 정리해 본다면 어떻게 표현 할 수 있을 까요?
 “의정활동에 있어 가장 보람된 활동이라면 뭐니 뭐니 해도 금천구의 분구를 이끌어 낸 것이다. 거주인원 약 75만 명의 인구가 득실거리는 구로구는 타 지역처럼 양질의 행정적 서비스를 받을 수 없는 여건이었다. 그러므로 상대적으로 피해를 입고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75만 명이라는 인구 숫자는 다른 지방의 대도시 인구에 버금가는 숫자다.
  이를 다른 차원에서 살펴보면 당시 중구나 종로구 같은 지역은 인구 약 25만 명이다. 공무원 수는 정부조직법에 따라 각 구가 같은 인원이다. 소위 티오(TO)가 공히 같다. 이를 바탕으로 비교해 보면 종로구나 중구에서 공무원과 주민이 1:1 관계로 행정을 편다고 할 때, 우리 구에서는 1:3의 행정을 펴는 것과 같다. 그렇다고 공무원 개개인의 월급이 더 많은 것도 아니다. 또 서울특별시로부터 교부금 등 예산을 별도로 많이 받아오는 것도 아니다. 따라서 구로구민들은 타 지역민보다 3분의 1 만큼의 서비스를 받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러한 불합리한 대우를 개선하려면 구로구에서 분구하는 수밖에 없다. 다른 대안은 정말로 없었다.
  그리하여 구청장이 참석하고, 각급 국장들이 배석한 자리에서 약 20분간의 의정질의를 폈다. 분구 논의는 그동안 세간의 이야기로만 회자되었지 그 누구도 공식적으로 문제를 제기하지 아니한 문제였다. 나는 필요성을 장황하게 펴 가며 주장했다. 행정력의 열세에서부터 치안, 교육, 교통, 문화 등 삶의 질에까지 세세한 면에까지 숫자를 나열해 가며 질의했다.
  질의가 끝난 자리에서 구청장 답변은 상당한 이유가 있는 주장 이라고 했지만, 일부 의원들은 “이러한 엄청난 행정재편 결정을 구의원이 주장한다고 되겠느냐”고 반문하는 이도 있었다. 그러나 그들에게도 구체적으로 설명하면서 실행계획을 뜻을 같이하는 의원들과 논의하는 등 뜻을 굽히지 아니했다.
  그 결과 구로구의회 내 분구대책위원회가 설치되었다. 위원장에 본인이 만장일치로 선출되었고, 간사엔 김헌식의원이 선출되어 전담체제를 갖추었다. 이를 바탕으로 도움이 될 만한 정부기관을 찾아 다녔다. 구민들이 열성껏 성원해 준 약 10만 명의 연명서를 서울대학교 앞 프린트 전문점에서 밤늦도록 복사했다. 이어 이를 청와대민원실에 접수시키고, 당시 내무부지방국, 국회사무처, 서울특별시장, 서울특별시의회, 국회의원 등 협조를 구할 수 있는 곳 어디든 찾아갔다. 정말로 열심히 정성으로 설득하고, 자문을 구하는 등 각고의 노력을 경주하였다.”

- 당시 에피소드는?
  “에피소드는 많았다. 우선 분구할 당시 구의회에서 구획을 정리하는 문제가 크게 대두되었다. 위에서도 밝혔듯이 구로구는 갑, 을, 병 3개의 선거지역구로 나누어 있었다. 갑 지역구는 천왕동, 고척동, 개봉동, 오류동 등 이고, 을 지역구는 구로동, 가리봉1,2동, 도림동 등 이며, 병 지역구는 가리봉3동, 독산동, 시흥동으로 나누어져 있었다. 이를 2개 구역으로 나누어야 하므로 그 경계선을 긋는 타협이 이해관계에 얽혀 고충이 많았다.
  소위 갑 지역구에서는 철로를 기점으로 나누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병 지역구에서는 가리봉1,2동을 포함하여 구로3동 일부(공단디지털 역;마장교천)을 포함한 신림7,8동(난곡사거리와 금천경찰서 부근)까지 포함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당시 갑 지역구 쪽의 국회의원은 김기배 의원으로 국회 내 운영위원장(현 원내대표)의 막강한 권세를 가진 의원이었다. 때문에 김의원은 자신의 지역구 중심으로 설정한 안대로 분구하자고 압력을 가해왔다. 그러나 우리는 뜻을 굽히지 않고 일관된 주장을 폈다. 김의원은 명분에 밀리게 되자 갑 지역구 출신 구의원들을 동원해 우리의 주장을 원천적으로 봉쇄하려 했다.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국회의원들을 동원해 필요 부처에 압력을 공공연하게 행사하기까지 했다. 이와 함께 김의원은 “만약 병 지역구 주장대로 분구가 결정된다고 하면 우선 구청사가 들어 설 자리가 있는가?” 또는 “구청사를 지을 부지가 있는가?”라고 비아냥거리기도 했었다. 이때 나는 “약 10만평의 군부대(독산1동)가 우리지역 한 가운데 있다. 이를 활용하면 될 것이다. 이 땅에 공원을 비롯한 문화시설과 구민을 위한 행정타운을 짓도록 하자”라고 설득했다.
  이 말을 들은 의원들조차 군부대가 이전하겠느냐고 반문하기도 했다. 그때마다 ‘수 방울이 바위를 뚫는다’는 말이 있다. ‘우리가 지역민들과 힘을 합쳐 추진한다면 안 될 것이 없다’는 강력한 의지를 보이며 한 치의 흔들림도 없이 추진해 나갔다.”

- 데모도 불사했다고 들었습니다.

 “그렇다. 권력에 크게 저항하기 위해 데모까지 펼쳤다. 우선 데모를 한다는 것이 의원신분의 양심에 부끄럽다고 생각하긴 했다. ‘데모만능주의’에 빠진다는 것은 의원신분을 망각한 자기 부정인 것 같아 그렀다. 국가로부터 엄연하게 논의의 장이 마련되어 있고, 그 중심에 선 의원들이 세간의 항변 수단을 빌려 의정활동을 한다는 것은 지금 생각해 봐도 부끄러운 일이다. 그러나 타당한 이유가 있었다. 다시 말 할 기회가 오겠지만 김기배 갑 지역구 출신 국회의원과의 대립에서 권력에 밀리기 때문에 도리 없이 세간의 눈길을 끌어야 했다.
  머리에 ‘분구쟁취’, ‘권력개입 결사반대’ 등 띠를 두르고, 분구를 사수하자는 문구를 빨간 글씨를 피켓에 쓰고 구청장실을 점거했다. 구청장실을 점거한 까닭은 김의원이 구청장에게 압력을 행사하고 있다는 정보가 있어 구청장은 그 압력을 이겨내야 한다는 경고로 우리의 단결된 힘을 과시한 것이다. KBS TV를 비롯해 각종 방송사에서 카메라를 앞세운 취재 경쟁을 했다. 사회 이슈가 된 분구 문제라 저녁 7시와 9시 뉴스시간에 결의문 낭독하는 우리들 모습, 특히 내가 직접 앞장서 항변하고 있는 그대로 촬영하여 방송하는 등 법석을 떨었다. 이로 인해 국회의원들도 김의원이 지역 일을 너무 간섭한다는 소릴 한다는 정보를 듣기도 했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초지일관하며 요로를 찾아 호소했다. 다행히 의원 빼지를 달았다는 이유로 관공서 출입이 자유로웠다. 한편, 당시 을 지역구 이신행 위원장께도 몇 명의 의원들이 집으로 찾아가 도움을 간곡하게 청했다. 마침내 뜻을 같이 해 주겠다는 약속을 받았다. 정말로 큰 원군을 얻어 그 계기를 삼아 더욱 박차를 가할 수 있었다.”

- 데모 과정에 어려움이 많았을 것 같습니다. 결과 못지않게 추진과정이 궁금합니다. 어떠했나요?
 
“데모를 꾸준히 추진하자 김기배 의원으로부터 분구 경계선에 대한 타협안이 나왔다. 그 경계선이란 오늘 날 금천구의 경계선을 제시한 것이다. 즉 이 제시안을 받아들이던가 아니면 자기의 안을 수용하던가, 양자택일 하라는 것이었다. 김의원의 이러한 제안은 금천구의 경계를 좁게 설정하면 세수의 어려움 때문에 포기할 것으로 생각한 꼼수의 제안이었다. 우리는 시한 마지막까지 숙의를 한 후 오늘 날의 금천구 경계선을 선택하자고 논의한 후 강공으로 나갔다.
  어느 날 김의원께서 나에게 전화를 했다. “박의원! 내 뜻을 따라주시게” 라는 전화였다. 나는 그 전화에서 “의원님! 의원님의 뜻을 알지만 우리 지역의 열화와 같은 여망도 알아주셨으면 합니다”라고 했더니 돌아오는 답신이 “박의원! 많이 컸구먼…” 하며 전화를 끊는다.
  결국 모든 결정은 의원 간 표 대결로 판가름 내도록 합의가 되었다. 표결의 결과를 예측하기엔 너무나 어려웠다. 아니 “무모한 판단이다”라고 모두들 낙담하는 처지였다. 그 이유는 전체 의원수가 50명인데 갑 지역구 성향의 의원이 27명이나 되고, 우리 쪽인 병 지역구 성향 의원은 23명에 불과했다. 이 중차대한 결정 앞에서 일심동체의 결의를 다짐하는 모인을 자주 가졌다.
  그러는 가운데 우리 쪽 일부 의원들이 갑 지역구 의원들과 협잡하고 있다는 정보가 전달 되어왔다. 23표 마저 갈려질 수 있는 상황에 도달하게 되는 비상상황을 맞이한 것이다. 일부 의원들은 “표결을 하면 패배할게 빤한 싸움이다”라고 일전을 앞두고 패배감에 사로잡히기도 했다. 이때 나는 필살의 작전을 간구하고 결사적으로 밀어 붙이자고 동료의원들을 독려했다. ‘패배감이 바로 패배를 불러 온다’고 일갈했지만 일부에선 빤한 싸움이라고 회의적 분위기였다. 나는 이에 한 치의 머뭇거림 없이 회의를 주관하며 뚝심으로 밀어붙였다.    
  그러면서 우리의 이탈 의원이 있는가를 살피고, 이를 막는 작전을 은밀하게 세워 이탈자 감시를 철저하게 했다. 만약 이탈자가 있으면 구민께 낱낱이 보고하겠다고 내부 엄포까지 공포한 후 그들을 감시할 젊은 동료의원들을 포섭했다. 그러는 한편, 갑 지역구 쪽의 친분 있는 의원들에게 우리 뜻에 단 한 표라도 협조해 달라고 적극적으로 설명했다. 분구를 한다는 것은 인구가 75만 명이나 되기 때문이니 인구 반쯤 되는 곳을 중심으로 분할하는 것이 타당한 것 아니냐고 연일 강조하고 설명하느라 힘을 소진했다. 정말로 힘겨운 설득작전이었다.”

- 분구를 위한 투표와 개표 순간이 긴박 했을 것 같습니다. 당시에 대해 말씀을 듣고 싶습니다.

  “피 말리는 개표 순간엔 숨이 막히는 줄 알았다. 그토록 긴장을 했다. 드디어 분구 구획을 결정하는 순간이 다가왔다. 모든 준비를 끝내고 호명에 따라 가로막 투표장에 들어가 기표를 하는데, 손끝이 떨린다. 혹여나 잘 못 기표해 무효표가 되지나 않을까 하는 염려가 극심하여 생긴 현상이었다.
  기표를 끝내고 좌석에 앉아 좌중을 응시했다. 결과를 미리 접쳐 보려는 심사에서다. 50명의 의원이 기표한 것을 확인하고, 투표함이 열렸다. 50표의 투표용지가 투표함에서 접혀 있는 채로 쏟아져 나온다. 개표위원들은 빠르게 투표용지를 펴 정리한다. 투표용지를 일일이 검표하고, 재 검표한 후 발표하려 한다. 이때 나는 우리 쪽 검표위원으로부터 이겼다는 사인을 받았다. 그래도 공포가 우선이라 마음조리고 있는데, 의장으로부터 “23 대 27” 이라고 숫자를 먼저 말한 후 잠시 머뭇거린다.
  아니 이게 웬일인가! 바로 그 숫자가 아닌가. 지역구의 편중 숫자가 그대로 발표 되는 것은 우리가 패했다는 의미다. 얼굴이 붉어진 채로 의장을 주시하고 있는 나의 눈에는 광체가 발했다. 생각해 보면 의장이 숫자를 부르고 잠시 머뭇거리는 시간이 아마도 10초 쯤 되었으리라. 그러나 쾌 긴 시간으로 기억된다.
  숨 막히는 시간이 흐른 후 의장은 “박종우 의원이 대표 발의한 분구구획 안이 가결되었음을 선포합니다. 탕 탕 탕” 의사봉 치는 소리에 자리에 앉아 숨죽이고 결과를 지켜보던 우리 쪽 동료의원들은 그 자리에서 공중부양을 하며 큰 소리로 승리감을 토해냈다. 여기저기서 축하 악수세례가 쳐들어온다. 얼싸 안고 회의장을 난장판으로 만들어도 누구하나 탓 하는 이 없었다. 다만, 갑 지역구 쪽 의원들은 뒤집힌 숫자에 허망하다는 듯 자리에서 꼼짝도 하지 않고 우리를 초점 잃은 눈으로 지켜보고 있었다.
  정말로 극적이었다. 이제 생각해봐도 극적인 장면이 아닐 수 없었다. 승리를 분석해 보면 우리 쪽 핵심의원들은 모두가 자기 일처럼 동분서주했기 때문이다. 조금도 주저하지 아니한 성과다. 즉 ‘진인사대천명’의 표본이었다. 그리고 모든 의원들이 내적 비밀을 함구하면서 상대 쪽 정보를 실시간으로 전달해 주어 작전을 철저히 수행할 수 있었다. 이 자리를 빌려 동료의원들께 감사의 말을 드리면서, 갑 지역구 의원들이 우리의 주장을 정의감으로 선택해 도와 준 의리에 감사를 드린다.
  여기서 23명의 의원들을 일일이 열거할 수 없어 특별히 능력을 발휘한 의원의 이름을 적어 놓음으로써 이제라도 다시 감사함을 표하고자 한다. 금천구 초대 유지운의장을 비롯해 분구대책위원회 간사 김헌식의원, 황병선의원, 천태증의원, 이인준의원, 박태룡의원, 최병순의원, 오형석의원, 윤석오의원, 김광문의원, 김주호의원 등은 물심양면으로 힘을 보태 준 의원들이었다.”

- 금천 지명을 짓는데도 사연이 있었다고 들었는데 어떤 일이 있었나요?

  “대단한 관심과 사연이 있었다. 분구 구역을 정하는데 일차 승리는 했지만, 분구한 후 임시청사를 마련하는 것은 행정사무라 크게 신경을 쓰지 않았다. 다만, 분구한 지역의 구명(區名)을 어떻게 짓는 것이 좋을까 궁리하는데 의견이 분분했다.
  여러 번의 모임에서 일차 논의를 하던 차 이경재국회의원의 사회로 시의원 그리고 구의원 23명 도합 32명이 모여 머리를 맞대고 지혜를 모았다. 어떤 의원은 ‘독산구로 하자’ 다른 의원은 ‘가산구 또는 시흥구, 삼성구로 하자’고 주장한다. 나는 ‘금천구로 하자’고 했다.
  각자 주장한 명칭에 대해 천거한 의원의 설명을 듣는 자리에서 독산구를 주장한 이는 ‘독산동이 우리 지역에 있으므로 독산구가 좋다’고 한다. 또 가산구를 주장한 의원도, 시흥구를 주장한 의원도 같은 논리로 주장한다. 이어 삼성구를 주장한 의원은 ‘우리 지역에 삼성산이 있으니 삼성구로하자’는 논리다.
  나는 모두의 주장은 주장에 불과한 역사성이 매우 미흡한 주장이라고 전제한 후 ‘금천이란 조선국 태종께서 1413년에 지으신 지명이다’라고 하면서 ‘금천의 지명역사를 살펴보면 고구려 장수왕(475년) 때 잉벌노현, 통일신라 성덕왕 때 곡양현, 고려 왕건왕 때 금주현, 조선 태종왕 때 금천현으로 382년간 사용되어 왔다고 설명하면서 참고로 1795년 정조왕 때 시흥현으로 개명된 이력’을 장황하게 설명했다.
  나의 설명을 듣고 바로 투표에 들어갔다. 32명이 투표용지를 받아 선호하는 지명을 써 개표한 결과 나의 주장이 27표를 얻어 구명으로 선정되었다. 영광스러운 순간이며 이렇게 많은 지지를 받을 줄 예측하지 못했다.
  이때 어떤 의원은 금천(衿川)이란 금(衿)자의 한자가 평소 싶게 보지 못 하는 글자라고 투덜대고, 일반인들도 알지 못하는 글자라고 조용하게 불만을 하는 의원도 있었다.
  이에 나는 ‘부산의 부 자도 부산(釜山)이라는 지명이 아니면 쉽게 알 수 없는 글자다. 그러나 지금은 누구나 가마 부(釜)자를 모르는 사람이 없다. 우리 옷깃 금(衿)자도 금천으로 지명이 널리 퍼지면 많은 이들이 즐겨 사용하는 한자가 될 것이다’라고 설명하며 이해를 구했다. 금천구는 이렇게 많은 이들의 관심 속에 탄생하였다.”
 
- 금천구의 출범도 흥미로웠지만 풀뿌리 지방자치 민선 초대 구의원을 지내면서  예결위원회 간사직과 도시정비분과위원회 위원장 업무를 성공적으로 수행했다고 들었습니다. 그때 그 시절은 어떠했나요?

  “정말로 우연스럽게 민선 초대구의원 출마를 하게 되었다. 우리지역의 지방자치 출범은 금천구가 탄생되기 이전인 구로구에서 출발했다. 금천구는 구로구 행정범위 안에 있었다.
  당시 나는 유지 분들의 도움을 받아가며 후배 대학생들과 함께 시흥야간학교를 설립해 초등과정과 중ㆍ고등과정을 가르쳤다. 
  이 일 뿐만 아니라 지역의 각급 단체에서 유지 분들과 함께 지역발전을 위해 봉사활동을 열심히 하던 시기이기도 했다. 이렇게 활발하게 지역 일을 하던 중 지방자치가 실시되었다. 이때 지역의 유지 분들이 적극 추천 해 엉겁결에 떠밀리다시피 출마를 하게 되었다.
  당시엔 구로구 인구가 약 75만 명이나 되었다. 그래서 의원선거에서 50명의 구의원이 선출되었다. 나는 선거구역 ‘병 지역구’인 시흥1동에서 출마했다. 당당히 당선되어 의정활동을 전개해 나갔다.
  의원으로 당선된 후 바로 예결위원회가 결성되었다. 나는 예결위원회의 초대 간사로 선출되어 구정에 따르는 전반적인 예산을 심의ㆍ의결했다. 사실상 의원으로 선출되었다고는 하지만 나라의 예산을 심의해 본 경험이 있는 의원들이 많지 않은 상태에서 예산을 다루어야 했다. 두툼한 예산서와 예산 지침서 등 한 보따리의 서류를 보자기에 싸서 책상에 올려놓았을 땐 머리부터 아파왔다. 그러나 예결위 간사 신분이라 이 묵직한 서류를 집에 가지고 와서 마치 학생이 숙제하듯 일일이 살펴보며 밤잠을 설치기도 했었다.
  예산서는 공무원들의 봉급에서부터 교통비를 비롯한 제수당, 기밀비, 업무추진비, 기관비, 판공비, 직급수당 등 수 십 가지의 항목을 직급별로 나누어 살펴보기란 여간 복잡한 것이 아니었다. 또 광활한 지역의 잡다한 사업들을 일일이 살펴보기란 더욱 어려웠다. 이를 꼼꼼히 따져보고 승인해야 하는 일은 바로 국민의 세금을 꼼꼼히 관리하는 일이라 한 순간도 소홀할 수 없어 더욱 사명감으로 챙겨봤다.
  이와 같이 예결위원회 업무를 성공적으로 수행했더니 당시 추교승 예산과장이 80억에 달하는 지역사업을 요구도 하지 아니하였는데도 편성해 주었다. 이러한 일련의 의정활동으로 나는 도시정비분과위원회 위원장에 선출되었다. 구로구 도시정비에 관한 일체의 업무를 심의ㆍ조정하고 승인하는 임무였다.”

- 당시 의정활동을 소개한다면
  “첫 의정질의에 나가 역설을 했다. 시흥역(현재 금천구청 역)에서 가리봉역(현재 가산디지털 역)에 이르는 4차선 도로개설의 필요성을 강조했고(현재 벚꽃 길), 각 지역의 상ㆍ하수도 정비 및 개설과 당시 열악했던 인도의 보도블록 보ㆍ개수, 그리고 한창 보급되기 시작한 생활편의 시설인 도시가스 개설사업 또는 주거환경이 열악한 마을에 재건축 및 재개발사업을 주민의 여론을 앞세워 추진하고 노력해 성과를 이루었다.
  그런가 하면 벚꽃 길 조성사업은 당시 구로구청장 이었던 강성환구청장이 서울특별시로부터 창의적 구정업무에 따른 성과금으로 받아 온 특별예산 일부를 활용해 벚꽃 10리 길을 조성했다. 이때 벚나무 식재를 검수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해 계약에 따라 일일이 실사를 하고 감시, 감독하였다. 즉 벚나무 굵기에 있어 지상에서부터 1m 높이에 흉고가 10㎝ 이상 이어야 함으로 줄자를 이용해 흉고를 하나하나 확인해 보는 등 철저하게 확인절차를 실시했다. 그 벚꽃 나무들이 오늘 날 금천의 봄철 ‘벚꽃축제’를 가져오게 했고, ‘걷고 싶은 거리’로 유명을 떨치고 있다.”

- 주로 심혈을 기우린 지역사업이 있었다면 어떤 것들인가요?

  “나는 시흥1동 출신 의원이기 때문에 시흥1동의 지역사업에 특별하게 관심을 기우렸다. 그 예를 살펴보면 당시 혜성ㆍ태성연립(중앙가든 뒤)과 일반주택(현 산돌교회)이 즐비한 마을에 숙원사업이었던 도시가스 보급을 추진했고, 이 지역에 있는 군부대와의 경계축대가 해동기를 맞아 붕괴 위험에 놓여 있는 것을 발견하고 구청지원 사업으로 정비해 주민들의 안전을 담보해 놓는데 일조를 했다.
  이어 현재 목련아파트 자리는 일명 ‘구 시장’ 이라고 해 6.25전쟁 이후 판자로 지붕을 잇고, 벽을 막은 판자촌이 밀집 마을이었다. 이를 서울도시공사로부터 아파트로 재건축케 해 오늘의 10층 아파트로 변신케 했다.
  또 이 지역 바로 옆 원미빌라 마을에도 주민의 숙원인 도시가스 공사를 완공시켰고, 장맛비로 인해 홍수가 일어나 하수도로 역류하는 현상을 정비하였으며, 일명 변전소 동리(시흥1동 복지관)에도 주민 숙원사업인 도시가스를 공급하는 공사를 서둘러 완공케 함으로서 주민생활을 보다 윤택하게 하는데 일조했다.
  이어 장마철 폭우로 홍수가 발생하였을 때 빗물펌프장의 늦장 대응으로 시흥사거리에 물바다가 될 때에도 현장에 달려가 관계자를 독려하여 주민 피해를 최소화하게 하는 등 의원으로서 의정활동에 동분서주하였다고 지역 주민들로부터 주민의 이름으로 감사패를 받기도 했다.”

- 지방자치 시대 구의원을 지내신 원로로 지방자치의 의의와 역할에 대해 한 말씀 하신다면,

 “지방자치 제도의 장점을 하나만 꼽아 본다면 지방행정의 문턱이 낮아져 지방행정에 대한 주민들의 접근성과 민원서비스가 향상되고, 주민들의 의견을 수렴하려는 노력이 증대 된다는 점이다.    그런가 하면 지방자치의 제도에 대한 몰인식 속에 일부 지방의원들의 도덕성, 청렴성, 전문성이 부족하다는 세간의 비판을 받아왔다. 때문에 광의적인 지방자치 제도가 절실하게 필요하다는 몰맨 소리도 심심치 않게 회자되고 있는 것도 오늘의 현실이다.
  이러한 문제점을 몇 가지로 추려보면 첫 번째로 기초의원에 대한 정당공천제를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이는 지방자치를 표방하면서 중앙정치, 즉 중앙정치권력에 종속ㆍ예속되는 자치 본연의 정신이 실종되어 가는 자치로 전락케 하는 계기를 낳게 했다. 이뿐만 아니다. 공천헌금 등 불법정치자금을 제공케 하는 등 비리의 온상이 되고 있다는 것도 꼬집지 않을 수 없다.
  다시 말하면 중앙정치권력의 개입과 간섭으로 지방의원의 자율성이 배제된다는 것은 법률이 정한 지방자치 제도의 원칙에 위배되는 행위를 범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관행적으로 이어 지는 제도는 조속히 폐지되어야 한다. 그래야 각 지역에서 진정으로 지역을 사랑하고, 발전을 도모할 수 있는 능력적인 인사가 주민들로부터 선출 되어 주민에 위한, 주민을 위한, 주민의 정치가 이루어지게 되는 것이다.
  두 번째로 지적할 수 있는 것은 지방의회 사무직원의 인사권이다. 현행 시행되고 있는 지방의회 인사권은 그 지방 자치단체장에게 있다. 제도적으로 독립된 의회에 근무하면서도 단체장에게 인사권이 있음으로 인하여 그 단체장의 눈치를 보느라 소신껏 의정활동을 지원하지 못 하는 이상한 현실을 낳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의회직원 인사권은 지방의회 의장이 행사케 해야 독립된 기관으로서의 기능을 수행할 수 있다. 여하튼 지방자치는 의회 중심으로 이루어질 때 좀 더 주민에게 가까이 갈 수 있다.
  위와 같은 경우 외에도 더 많은 문제점들을 찾을 수 있지만,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지방자치는 보완하고, 개선해 나가면서 확고한 자리를 잡아 가야 한다.”

- 앞으로 금천구 발전에 대해 제언한다면

  “금천구의 발전을 저해하는 요인들 중에는 복지, 교육, 환경 등을 꼽을 수 있겠지만 무엇보다 우선적으로 개선해야 할 것은 행정구역 재편이다. 금천구는 행정관활 구역이 너무 좁다. 이는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특정 국회의원의 욕심 때문이었다.
  금천구의 옛날(시흥군 동면) 지역은 1895년 시흥현이 시흥군으로 승격되면서 최초의 군청 소재지가 시흥5동 은행나무 골에 있었다가 1910년 영등포 문래동으로 이전한 후 1949년 안양으로 이전했다. 이 당시의 관활 구역은 영등포 일부(신길동) 지역을 비롯해 관악구 전체와 동작구 일부(노량진), 그리고 광명시 일부(KTX역사), 안양시 일부(삼막사와 안양예술공원) 지역까지 상당히 넓은 지역이었다. 
  그 때의 영화를 접어 두고서라도 현재 구로구 가리봉1, 2동과 구로3동 일부(공단디지털역 마장천), 관악구 일부(난곡사거리), 안양시 일부(삼막천과 국철로변) 등을 편입해야 한다. 이는 금천구로서는 최소한의 요구사항이다.
  이러한 문제점이 있음에도 이를 해결하지 못 하고 있는 것은 우리 지역에 역량이 큰 인물이 없어 해결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만약 지역을 대표하는 국가적 큰 인물이 탄생했더라면 오늘날과 같은 외소한 지역의 낙후된 현상을 보고만 있을 턱이 없다. 힘이나 권력으로 빼앗아 오자는 것이 아니라 잃었던 지역을 서로 윙윙한다는 차원에서 정상적으로 환원하자는 것이다.
  이 일을 위해 금천구 주민들은 다 같이 대동단결해야 한다. 지푸라기 하나라도 들출 수 있는 힘을 가진 구민이라면, 금천구와 어떠한 인연이라도 있는 구민이라면 시간, 장소, 역할 등을 가리지 말고 뜻과 역량을 발휘해야 한다.
  이는 우리 후세들이 우리에게 바라는 과제다. 후세들에게 남겨 주어야 할 재산이기에 더욱 막중한 것이다.
  앞으로도 지역의 현안에 대해 열심히 일하겠다는 선량들이 많이 나설 것이다. 또 그러해야 한다. 이들은 산적해 있는 많은 지역 일에 열중하면서 지역의 보다 큰 과제인 행정구역 재편에 힘을 경주하기 바란다. 이 사업은 선량들의 당면 과제다. 어떠한 역경이 있다 하더라도 꼭 성취해 주길 25만 구민의 이름으로 청원한다.”

- 마지막으로 구민들에게 한 말씀 드린다면,

“금천구민 여러분, 금천구가 더욱 발전할 수 있도록 많은 관심과 협조를 부탁드립니다. 항상 건강하시고 행복하셨으면 좋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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