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골 김 성 호(시인)

 
  직립보행의 인간이 네 발로 뛰는 짐승과 다른 점은 선견을 앞세워 먹이사냥 시에만 활동하는 짐승들을 사육으로 다스릴 수 있다는 장점이다. 신(神)이 애초부터 인간에게 내린 머리 적 축복이다. 그래서 사람과 사람, 사회와 사회 사이에서 화두로 등장한 말이 "먼저 인간이 돼라."이다. 사실 인간적 사고력을 제대로 갖추지 못한 사람에게 일을 맡기면 골치 아픈 낭패를 겪는 경우가 많이 발생한다. 크게는 국가나 회사운영을 진퇴양난에 빠트리고, 작게는 친목모임, 또는 개인 간 유대에도 흠집을 터트리기도 한다.

  짐승은 배만 부르면 잠을 잔다. 그러나 인간은 힘을 얻은 매 끼니 바탕에서 오늘보다 좀 더 밝은 내일을 준비한다. 그 준비는 개개인 목적에 따라 다르지만, 고3생들은 치른 수능점수를 안고 선택한 대학학과에 입학원서를 내고, 은퇴 후 인생 제2막을 열려는 부모세대들은 그동안 쌓은 경험연장을 꿈꾸거나 적성에 맞는 새로운 직종지식에 열을 올린다.

  그의 사업초기는 임대받은 단층건물 만큼이나 초라하기 짝이 없었다. 그 사업장에서  테이블을 가운데 두고 마주앉은 그는 여기까지 오게 된 동기를 술술 풀어 놓았다. "이 준비를 위해 이혼의 아픔 속에서 천여 권의 책을 탐독했다. 그 다음에는 재정마련을 위하여 압구정동에서 노정상을 시작했다. 떡 판매는 예상 외로 실적이 좋았다. 종자 천만 원으로 신촌역 인근에다 민들레영토 간판을 내걸었다. 안수 받은 목사이며, 등단시인의 신분을 내면에 묻고 현재는 마케팅 사업에만 매달려 있다."

  주 고객인 젊은 층들이 떠밀어 준 민들레영토 카페는 안암동, 종로 등지로 사업범위를 확장한 지도 오랜 세월이 흘렀다. 그는 출석교회에서 사귐이 시작되었으며, 안방에 들어앉아서 TV드라마를 즐겨 보는 시청자들이라면 낯이 익었을 법한 유명탤런트와  재혼한지 삼년 차를 맞고 있다.

  눈이 관심 둔 사물에만 머물 듯이 길은 깨닫는 데서 열린다. 삶에는 두 부류의 배움이 있다. 그 하나는 몸으로의 배움이고, 또 다른 하나는 책으로의 배움이다. 몸으로의 터득은 경험으로 남지만,  책은 창조의 근간인 원동력과 인지능력을 길러준다. "우울 안의 개구리는 바다를 모른다." 우리속담과 유사하게 "우물 안 개구리는 바다를 논할 수 없네."라는 중국속담이 있다.

  독서는 무지에서 헤어 나오게 한다. 독서는 잠복 생각을 구체적으로 일깨워 주는 역할을 맡고 있다. 독서는 두뇌회전을 불러일으킨다. 독서는 지평(식견)을 넓혀 준다. 독서는 발전을 넘보는 미래의 투자이다. 느림의 여유로 한 면 한 면 넘기는 책장은 정보를 제공한다. 독서는 무용한 잡념을 걸러내는 힘을 지니고 있다. 독서는 내적 지혜를 쌓게 하는 비밀을 간직하고 있다. 독서는 개인의 품격을 높여 줄 뿐만 아니라 언어도 다듬어 준다. 독서는 조망에 지각을 얹어줄 뿐 아니라 사리분별에서도 두각을 드러낸다. 특히 "무쇠도 갈면 바늘이 된다."는 우리말처럼 필요의 존엄성을 깨닫게 한다.

  다른 사람의 삶을 문자로 읽어나가면서 공감을 느끼며 목표를 세우게 하는 독서는 진정 저변의 힘이 아닐 수 없다. 국내 한 대기업에서 '사람이 미래다.'라는 슬로건을 대중광고 문구로 내건 적이 있었다. 평소 책을 많이 읽는다는 회장이 직접 지은 아이디어란다. 이토록 책을 일상의 벗으로 둔 사람의 머리에서는 감탄을 이끌어내는 슬기가 번득거린다. 백화쟁비독서향(白花爭比讀書香)의 뜻은 백 가지 꽃의 향기가  독서의 향기에 미치지 못하다 이다.

  우애가 깊은 핏줄의 형제일지라도 대신하여 줄 수 없는 게 몇 가지 있다. 네 인생 내 인생될 수 없다와, 차마 볼 수 없는 고통의 병세 내게로 옮겨 오게 할 수 없다 등등이다. 주어진 나의 인생을 책임질 사람은 그 누구도 아닌 바로 나 자신이다. 세상살이는 쓴맛 단맛의 연속 굴레이다. 책은 감정을 어루만져 준다. 그러므로 책은 나를 이끄는 나의 스승이다.

  한 권의 책은 그 필자의 은둔의 고독에서 만들어진다. 세상에 상재되어 독자들의 손길을 기다리는 그 책들에도 여타 시장상품처럼 악서와 양서로 나눠진다. 내용 무게도 부담 없이 읽히는 가벼운 책이 있는 반면에, 재미가 없어 읽기 거북에 직면하는 무거운 책도 있다. 글을 전문적으로 쓰는 작가에게는 무슨 책이든  참고 자료로 쓰이나, 자기 중심관이 물렁하거나 확립성이 살얼음판인 독자라면 인격에 미칠 영향을 고려하여 책 선택에 아주 신중해야 한다.

  그녀는 손자손녀를 둔 할머니이다. 그녀는 국민노인연금에서 공개 모집한 '봉사체험사례수기'에 응모하여 장려상을 수상했다. 그녀는 그 기쁨을 전화문자로 알리며  축하 말을 듣고 싶어 했다. 시인은 국화꽃을 비유 들어 늦깎이 입상을 격려했다. 며칠 전 단원 몇몇과 하프 연습 중인 그녀를 기다렸다 함께 나왔다. 점심때가 한참 지난 시간대라 식당은 우리 둘 뿐이었다. 여러 방면으로 활동력이 넓은 그녀는 주문해 둔 식사가 나오기 전에 책값이라며 봉투를 내밀었다. 그러면서 "심성을 깨우는 일이 얼마나 보람이 큽니까."라는 말을 덧붙였다. 시인은 큰 위로를 받았다.

"'오매, 단풍 들것네/ 장광에 골 붉은 감잎 날아오아/ 누이는 놀란 듯이 치어다보며/ 오매, 단풍 들것네.'" 김영랑의 오매, 단풍 들것네 싯귀가 절로 읊어지는 가을은 청조한 독서의 계절이다. 하늘이 높으니 정신도 한결 맑아 책 읽기에 더 할 나이 없는 풍성한 노을빛 계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