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지문 댓돌 위에서 먹고무신 한 켤레가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다
 
동지도 지났는데 시커먼 그을음뿐
흙부뚜막엔 불 땐 흔적 한 점 없고,
이제 가마솥에서는 물이 끓지 않는다

뒷산을 지키던 누렁개도 나뭇짐을 타고 피어나던 나팔꽃도 없다
산그림자는 자꾸만 어두운 곳으로 잔설을 치우고
나는 그 장지문을 열기가 두렵다
 
거기서 먼지와
나를 보고 울음을 터트릴 것 같은,
저 눈 벌판도 덮지 못한
내가 끌고 온 길들

- 박영근님의 길 중에서

먼저 쓸쓸함이 가슴을 답답하게 하는 글이다.
세상은 한 점 어느 부위에 가만히 앉아 있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보지 않는 사이에 저쪽 지구의 끝 쪽에서 서있는 것이다.
오고가는 길은 아무데나 있지만 내가 걸어 온 그 길은(거기서 먼지와/
나를 보고 울음을 터트릴 같은/저 눈 벌판도 덮지 못한/ 내가 끌고 온)
여기, 이곳에만 존재하는 것이다.
존재하고 있는 그곳에는 먹고무신도 없고 물도 끓이지 않는다.
누렁개도 없고 나팔꽃도 피지 않는 삭막한 곳으로 변한지 오래다.
다만 죽음의 냄새가 나는 썩은 도회지의 어느 한 곳일 뿐이다.
지금 그곳에 나와 우리 모두가 서 있는 것이다.
이렇게 만들어 놓은 자는 과연 누구이며 그는 어디서
무엇을 하며 살고 있을까? 묻지 않을 수 없다.

-시인 박연복(氷心http://blog.daum.net/yen307/1584904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