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 정 숙
                                                                        수필가, 금천문학아카데미 고문
                                                               금천문인협회 이사, 한국문인협회 회원

 질식할 듯한 더위가 한풀 꺾이더니, 아침저녁으로 찾아드는 선들바람이 상쾌하다. 더불어 추석 이야기가 본격화되는 모양새다. 명절 선물이라든가 차례 비용 등이 셈 빠른 이들에 의해 발표되고, 명절 스트레스란 말이 이번에도 어김없이 여기저기서 심심치 않게 들려온다.
 나 역시 스트레스라고 할 것까지는 없지만 추석을 십여 일 앞두고 궁리가 많다. 추석을 대표하는 음식이 송편인데, 금년에야말로 집에서 송편을 빚어야 할지 말지 쉽게 결정이 서지 않아서이다.
 송편은 다른 떡보다 만드는 과정이 많이 번거롭다. 쌀가루를 익반죽해서 너무 되지도 질지도 않게 송편 살을 준비해야 하고, 거피한 녹두나 팥을 잘 쪄 소를 만들며, 그 외에 밤이나 대추 혹은 풋콩과 깨소금 등 갖가지로 소를 준비하는 일이 만만치 않기도 하지만, 무엇보다도 하나하나 모양을 만들어 빚는 일이 시간이 많이 걸려 어렵다.
 추석에는 차례 음식을 여러 가지 준비해야 하므로, 나는 아이들이 어렸을 때부터 내 어머니가 그러셨던 것처럼 아이들의 도움을 받아 집에서 송편을 빚었다. 삼남매가 모두 솜씨가 좋아 송편을 아주 예쁘게 잘 빚었고, 나는 나중에 찜솥에 쪄 내기만 하면 되어서, 딸들이 혼인하여 내 곁을 떠나기 전까지는 추석 때 송편 빚는 일을 걱정해 본 적이 없다. 딸들이 출가한 후 그 일을 아들이 홀로 맡게 되었다. 며느리가 거들 때가 있기도 하지만, 오랜 세월 숙련된 아들의 속도와 솜씨는 절대적인 것이어서, 그의 도움이 없다면 집에서 송편 빚을 엄두를 낼 수 없는 형편이다. 그런데, 해마다 묵묵히 어미의 일을 잘 거들던 아들이 기어코 작년에 불평을 하는 것이었다. 사십 중반이 되도록 추석 전날 백사(百事)를 작파(作破)하고  꼬박이 들어앉아 송편을 빚게 될 줄은 몰랐단다. 그 말에, 나 역시 칠십이 훨씬 넘도록 부엌에 서서 명절 준비를 하게 될 줄은 몰랐다고 곧바로 받아쳐 주었지만, 내심 미안한 생각이 안 든 것은 아니었다. 그리고 일 년, 다시 추석 명절이 다가오고 있는 것이다.
 사람들은 귀찮게 왜 집에서 떡을 만드느냐고 한다. 떡집에서 조금 사다가 차례도 지내고 식구들이 나누어 먹으면 될 것을 공연히 사서 고생을 한다며, 나의 사는 방식을 답답해한다. 나 역시 쉽게 사는 방법에 대해 유혹을 받을 때가 있기도 하지만, 전국적으로 똑같은 모양과 맛으로 획일화된, 떡집의 송편이라고 이름 지어진 떡이 마뜩찮으니 어쩌랴.
 솔 내가 은은히 풍기는 송편, 빚은 사람의 솜씨가 고대로 드러나 골라 집는 재미를 주는 송편, 그리고 갖가지 소를 넣어 베물 때마다 무슨 소가 들어 있을까 호기심이 발동하고 기호에 따라 환호하게도 혹은 실망하게도 하는 송편은 그 예쁜 맵시와 더불어 과연 떡 중의 으뜸이라 여겨진다. 그러면서 송편은 은근히 그 집의 가풍(家風)을 드러내기도 한다. 
 언제부터인가 우리 사회에서는 전통적인 것을 무시하고 기피해야 개명(開明)한 앞선 사람인양 행세하는 분위기이다. 뿐만 아니라 편리하고 기능적인 것만을 선호하는 추세라서, 집에서 떡을 한다든가 차례 상을 전통방식대로 격식을 차려 장만한다고 하면, 천연기념물이라며 마치 외계인을 대하듯 한다. 그러나 전통적인 풍습을 답습한다는 것은 그 집안의 내력 곧 문화를 이어 간다는 뜻이다. ‘나’라는 생명이 유래한 뿌리를 잊지 않고, 줄기와 잎을 더욱 번성케 해 튼실한 열매를 면면이 맺어 잇자는 뜻이기도 하다. 한 나라의 전통적인 고유의 문화가 하루아침에 이루어지는 게 아니듯, 한 가정의 가풍도 꾸준한 인고(忍苦)의 세월로써 이루어지는 것이라 믿는다.
 아마도 나는 십여일 후 추석 안 날, 명절을 쇠러 본가에 온 아들 앞에 거의 틀림없이 쑥이며 단호박 등으로 색을 낸 송편 반죽과 여러 가지 소가 든 그릇을 슬며시 내밀 것이다. 미안하긴 하지만 달리 빌 손이 없고, 이것이 우리 집 전통이니 어쩌겠니 하면서 말이다.
 매사 속도전(速度戰)이 치열한 시대이긴 하지만, 꼭 송편을 빚는 일이 아니더라도 더디고 답답하고 번거로운 일을 차근차근 하면서 또 다른 삶의 지혜를 깨우쳤으면 하는 바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