같은 곳을 여행하고 돌아와도 어떤 친구들은 여행지에서 느낀 여러 가지 감흥을 이야기하기도 하고 깊이 있고 재미있는 정보를 제공하기도 하는데, 또 다른 친구들은 어디를 어떻게 다녀왔는지 아무런 느낌도 없고 금방 기억조차 못하는 경우도 있다. 돌멩이를 보고도, 길가에 피어있는 한포기 풀을 보고도 감흥에 취해 시를 쓰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돌멩이를 발로차고 풀잎을 밟으며 무심코 지나치는 사람도 있다. 참으로 유치한 유행가라도 어떤 이의 가슴에는 깊은 파장으로 다가오기는 하나, 어떤 이는 그러한 유치한 유행가를 부르는 사람을 질책하기도 한다.

박달회라는 이름의 의사 수필동인회의 멤버가 된지도 벌써 강산이 두 번이나 변할만한 세월이 흘렀다. 중고등학교 시절 다른 과목 성적에 비해 비교적 괜찮은 편이었으나, 국어점수는 언제나 중하위를 맴돌았던 내가 의사회장을 하면서 진료실 주변에서 일어나는 이야기 몇 편을 의사신문에 기고한 것이 계기가 되어 박달회 초대를 받아 멤버가 되었다. 내가 글을 쓴다는 사실을 주변에서 통 믿지 않았다. 오죽하면 내가 친구들에게 내 글이 실린 박달회 수필집을 처음 전달하자 어떤 친구는 “그 글 네 마누라가 쓴 것 아니냐?”고 묻기도 했다.

이젠 세월이 많이 흘러서 그렇게 묻는 친구는 없지만, 아직도 내 글을 읽어보지도 않고 책을 그대로 덮어버리는 친구가 있다는 것을 나는 잘 알고 있다. 매년 연말에 출간되는 박달회 수필집을 한정된 친지나 친구에게 나누어주는 일도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다.
내가 한 친구에게 책 빚을 갚으려고 그 친구에게 나의 책을 건네주는데 마침 그 현장을 다른 친구에게 들키면 그는 책을 좋아하지도 않으면서 “왜 내게는 책을 주지 않느냐?”고 시샘을 하기도 한다.
책을 받은 사람들의 반응도 백인백색이다. 한 노 은사님은 별로 잘 쓰지도 못한 나의 수필을 읽으시고 “닥터 리! 그 수필 내 와이프와 매년 함께 재미있게 읽고 있어! 고마워!” 라는 인사를 보내주시고, 또 다른 교수님은 연말에 나오는 그 책이 조금만 늦게 전달되어도 “올해는 책 안줘? 얼마나 기다리고 있는데!” 하며 잘 쓰지도 못한 책을 기다려 주신다. 이 두 분은 내가 존경하는 스승님으로, 나보다는 휠씬 글을 잘 쓰시고 자기 책도 여러 권 내신 분이다.

한 고교동기는 교수도 지내고 지식도 많은 친구라 내가 그 친구의 재미있고 깊이 있는 유머를 간혼 나의 글에 인용하기도 하는데 “야 헌영아! 네 글은 너무 꾸밈이 없고 쉽게 써서 읽기가 참 좋다. 매년 기다린다.”면서 격려해준다. 그리고 책의 내용을 샅샅이 읽고 평가와 함께 교정까지 정확히 보내주는 고마운 친구도 있다. 그러한 분들은 클래식에 정통하면서도 유행가를 멸시하지는 않는 분들이다.

그런가하면 비록 매년 100권의 한정본이지만 가까운 친지나 친구이기 때문에 책을 부쳐보면 오히려 부담을 느끼는 사람들도 제법 있는 것 같다. 겨우 목차만 보고 내용은 전혀 읽어보지도 않고 치워버리는 친구, 아예 목차도 열어보지 않는 친구, 유명한 법조인인 어느 친구는 자기가 그렇게 쉽게 글을 쓰지 않는다면서 내가 쉽게 글 쓰는 것을 못마땅하다는 듯 말하는 친구, 친한 친구가 책을 주면 읽어보지 않을 수도 없어서 책을 받기가 겁난다고 솔직히 고백하는 친구 등등 참으로 다양하기도 하다. 나는 그러한 친구들이 아무리 가까운 사이라고 해도 앞으로는 절대로 책을 주지 않겠다고 다짐하다가도 또 실수를 하여 책을 전하고 나서는 또 후회를 한다.

제일 기가 막힌 사건은 너무나 가까운 사람이라 매년 책을 주어 오다가 올해 자기의 이야기를 책속에 써두었는데도 아무런 반응이 없어서 못내 궁금하였던 일이다. 언젠가 그와 술좌석에 함께 할 기회가 있어서 슬쩍 한번 물어보앗다.
“자네, 내가 준 책에 있는 수핑 가운데 자네에 관해서 쓴 내용이 있는데 읽어봤어?”
괜히 물어봤나 싶어서 바로 후회가 되었는데, 그 친구 답변이 나를 아연실색케 하고 말했다. 자기는 오로지 신앙공부에만정진하고 있기 때문에 주변사람들이 주는 잡다한 책들은 거의 읽지 않는다고 자랑스럽게 이야기하는 것이었다. 그동안 내가 주었던 책들이 전부 쓰레기통에 바로 들어갔다고 생각하니 커다란 망치로 뒤통수 한방을 얻어맞은 것 같았다.

혼자서 가슴앓이를 하고 있던 나에게 한 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대학교수를 지낸 존경하는 친지의 전화였다.
“주신 책 방금 다 읽고 전화하는 것입니다. 잘 읽었습니다.”
그리고 내가 쓴 수필의 내용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공감을 표시한다. 음악으로 치면 클래식에 정통한 그 교수님이 싸구려 유행가에 해당하는 나의 부족한 글을 읽고 속으로는 ‘별로다’라고 생각하셨겠지만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라는 말을 알고 실천하시는 분 같았다. 내가 준 책을 열어보지도 않았다는 친구로 인해 가슴앓이 하고 있는 나의 가슴을 쓰다듬어 주는 고마운 전화였다.
그리고는 혼자서 쓴 웃음을 지으며 생각해 보았다. “글도 잘 쓸 줄 모르면서 독자의 반응에는 왜 그렇게 민감하냐?” 고 스스로에게 질책하는 반문을 한다.

내 글을 칭찬해 준분이나 내 글을 비판하는 분들 모두가 나의 가까운 친지이거나 친구들이다. 그분들의 반응을 보면서 인간은 모두 자기 잘난 맛에 산다는 것과 하찮은 돌멩이도 어떤 이에게는 멋있는 수석으로 대접받기도 하고 어떤 이에게는 공연히 길에 놓여 오고가는 발걸음에 걸림돌이 되기도 한다는 사실을 배우게 된다.
미천한 글이라도 훌륭한 사람은 그 속에서 귀한 것들을 찾아내기도 하지만, 또 어떤 이들에게는 그런 것들이 그저 귀찮은 존재일 수밖에 없겠다는 사실이다.

“인간은 아는 만큼 느낄 뿐이며, 느낀 만큼 보인다.”라는 말이 마음에 와 닿는다. 그리고 “세상에는 클래식도 있지만 유행가도 있다. 세상에는 유행가를 좋아하는 사람도 있다.”는 말로 허접한 글을 쓰면서 고민하는 나 스스로를 위로한다. 나는 전문적으로 글을 쓰는 ‘작가’가 아니라, 취미로 글을 써보려는 ‘정형외과 의사’이기 때문이다. 내 글을 읽어주는 한 사람의 독자만 있다면 나는 앞으로도 계속 글을 써보련다.